2021, 2023
PilLow Rx
PilLow Rx는 당시 기준으로 디지털 치료제(DTx)에 대한 개념과 정의가 국내외 모두에서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치료제’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해석조차 일관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단계에서는 디지털 치료제가 무엇이며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치료제’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규제 기준과 의료 실무 양측에서 충분히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디지털치료제 & 불면증
이 프로젝트는 특히 불면증을 주요 타겟 질환으로 삼았기 때문에, 해당 질환에 대한 임상적 이해도 병행되어야 했다. 대부분의 불면증 환자는 약물을 통한 일률적인 치료가 어렵고,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인지행동치료(CBT-I)와 같은 행동 기반의 접근이 중심이며, 약물은 상황에 따라 보조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치료 패턴은 필로우가 추구해야 할 기능적 방향성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최초의 형태
불면증 치료의 핵심은 개인에게 필요한 수면 시간을 파악하고, 이를 매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있다. 실제 임상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꾸준히 실천할 수 있도록 수면 위생에 대한 교육과 잘못된 습관을 인식하게 돕는 지도가 함께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필로우의 초기 기획 역시, 사용자가 매일 수면을 기록하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면 리듬과 개선 방향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통해 필요 수면량에 대한 이해부터 잘못된 패턴의 자각, 개선 행동으로의 유도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앱을 통한 기록의 어려움
가장 큰 과제는 수면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였다. 환자가 입력해야 할 항목이 많고 항목 간의 연관성도 높은 데다, 입력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알람 종료 직후 수면 기록 화면으로 진입하도록 설계했는데, 예를 들어, 사용자가 알람을 종료하는 행위를 ‘기상’으로 간주하고, 이후 나머지 항목들을 순차적으로 확인하는 식이다.
이러한 설계는 사용자가 직전 수면을 비교적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시점에 기록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또한, 정확한 시각 입력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잠든 시간’을 비롯한 주요 항목에는 범위 기반 입력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실제 치료 과정에서 절대적인 정밀도보다는 반복성과 경향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반영한 설계였다.
이러한 입력 방식은 사용자의 인지 부담을 낮추는 동시에, 일정 수준 이상의 데이터 정확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추가로, 전일 입력값을 기반으로 한 입력 보조 기능과 이후 적용 예정이었던 스마트워치 연동 등을 통해 사용자 기록의 부담과 오류 가능성을 전반적으로 줄이고자 했다.


1차 축약 버전
환자 ≠ 사용자 ?
초기 기획에서 환자가 입력해야 할 항목은 30개에 육박했다. 사용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조정을 시도했고, 절반 수준인 14개 정도까지 줄일 수 있었다. 이후 4개를 다른 단계로 옮겨 최종적으로 10개까지 축소했지만,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기획 초기부터 다수의 의사가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UX 전문가는 아니었기에 사용성보다는 임상적 정확성과 정보의 완전성을 중시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의료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바로 이점 때문에 설득에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 대표적인 예로, 스마트폰을 통한 데이터 입력이 수기 작성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기에 의료적 관점이 더해지면서, 환자에게 많은 입력 항목을 요구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환자는 사용자(User)가 아니다”라는 관점이었는데, 배경은 이렇다. 환자는 치료를 목적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들이고, 의사의 지시에 성실히 따르며, 수면 기록과 같은 과제는 요구한 것보다도 더 자세히 작성해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UX의 편의성보다는 입력 항목을 다양하고 정밀하게 구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이에관해 거의 반년에 걸쳐 협의를 이어갔지만, 생각을 완전히 바꾸기는 어려웠다. 결국 첫 번째 임상시험 이후에서야, 입력 경험이 환자의 참여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일부 받아들이게 됐다.
사실 이러한 인식 오류는 자신의 경험을 일반적인 사례로 판단하는 전형적인 유형으로, 의사뿐 아니라 UX에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특히 디자인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정량적 수치나 명확한 인과 관계로 설명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에, 이런 일반적인 오류조차 설득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환자의 치료를 위한 앱을 만들고자 했음에도 기획은 진료 편의성에 집중되었고, 이로 인해 사용자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입력해야 했지만 이에 상응하는 메리트는 제공되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의료진과 함께 디지털 치료제 관련 프로젝트를 네 차례 더 진행했으나, 유사한 문제들이 반복되었다. 초기에는 빈번한 미팅과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이는 업무 효율성 저하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구분하고, 논의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사전에 안건과 목표를 명확히 한 소규모 회의로 제한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러한 조정을 통해 의료진과 디자이너 간의 이해 차이를 줄이고 협업의 효율성을 일부 개선할 수 있었다.
사용자는 읽지 않는다
수면 기록 화면 내부 테스트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관찰되었다. 평소 사용자가 텍스트를 잘 읽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안내 문구를 항상 간결하게 구성해왔지만, 이번에는 내용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입력을 진행한 사례가 나타났다.

테스트 참여자들은 ‘잠자리에 든 시간’을 입력한 후, 다음 항목이 ‘깨어난 시간’일 것이라 예상해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입력하는 경우가 있었다. 비록 수면 기록 화면만을 대상으로 한 제한된 테스트였지만, 사용 흐름상 충분히 발생 가능한 문제로 판단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보완책을 적용했다.
첫째, 사용자가 ‘잠자리에 든 시간’ 다음 입력해야 할 항목을 ‘깨어난 시간’으로 오해하여 잘못 입력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잠자리에 든 시간’과 ‘잠에 빠진 시간’(원래 입력되어야 할 항목)간 차이가 비정상적으로 클 경우, 입력값이 사용자의 실제 의도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도입했다. 이 조치는 불면증 환자가 실제로 비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기록할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다.
둘째, 입력 항목의 순서와 설명을 조정하고, 설명 문구를 구어체로 변경하여 오해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이러한 조치 후 임상시험 결과를 보면, 첫 번째 기록 시 일부 오입력 사례가 있었으나, 두 번째 기록부터는 문제 발생이 크게 감소했다.
이 사례는 단순 입력오류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사용자는 읽지 않는다 는 인지오류를 발견하고 대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 개선 조치 이후 오류 발생이 유의미하게 감소했으며, 이후 유사한 맥락의 입력 흐름 설계에도 참고 기준으로 적용되었다.

수면 기록 - v1.0

수면 기록 - v2.0
홈 화면의 역할과 설계 의도
디지털 치료제 앱은 일반적인 건강 앱과 달리,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의사의 권유에 따라 설치된다. 이 때문에 사용 경험은 일이나 숙제에 가깝다. 수면 기록을 꾸준히 입력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여기에 더해 인지치료 활동까지 요구되므로 환자의 부담은 더욱 커진다. 그렇다고 치료에 필요한 활동을 임의로 제외할 수 없기에, 차라리 환자가 해야할 활동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 방향을 정했다.
마치 모바일 게임의 퀘스트 목록이나 메신저 앱의 채팅 목록처럼, 새로운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단순하게 구성했다. 상단에는 매일 기록해야 하는 정보를, 하단에는 그날 필요한 수면 기록과 활동을 배치했다. 임상시험 결과, 홈 화면을 통한 활동 참여 비율이 증가한 반면, 전체 앱 사용 시간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사용자들이 필요한 활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음을 시사하며, 화면 설계가 사용자 활동 유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예상된다.

홈 화면 - 최초 진입

홈 화면 - 3일 경과
읽기 컨텐츠
서비스 내에는 단순히 읽는 형태의 콘텐츠가 포함되어 있다. 환자들이 이를 꾸준히 소비할지는 알 수 없으나, 치료상 반드시 제공해야 하는 요소이므로 우선 가독성 확보에 중점을 두고 설계가 진행되었다.
다양한 리딩 앱을 참고해 콘텐츠의 양을 최대한 줄이고, 하나의 콘텐츠가 4페이지를 넘지 않도록 편집했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마다 스마트폰으로 한 페이지 분량의 글을 읽는 속도 차이를 테스트했는데, 당초에는 콘텐츠별 예상 소요 시간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이후에는 가독성이 더 좋은 폰트 크기를 탐색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또한 자동 넘김 기능과 자막 기반의 애니메이션화도 고려 중이었기에, 이 테스트는 향후 콘텐츠 형식 전환을 위한 기초 자료로도 의미가 있었다.
경험상, 글을 읽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시선을 따라 조용히 읽는 ‘시각 중심형’, 다른 하나는 속으로 소리 내듯 읽는 ‘음성 중심형’이다. 약 30명을 대상으로 테스트한 결과, 두 유형은 유사한 비율로 나타났고,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 소요되는 음성 중심형 사용자의 평균 읽기 속도는 약 14초였다. 이 데이터를 기준으로 콘텐츠별 예상 소요 시간을 산정했으며, 해당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모든 리딩 콘텐츠의 폰트 크기, 자간, 행간 등의 가독성 기준도 함께 확립할 수 있었다.



미션 콘텐츠
반복 사용을 전제로 한 입력 UI 설계
초기 수면 기록 화면은 스크롤 기반의 단일 화면으로 설계했다. 일반적으로 스크롤이 많거나 한 화면에 많은 정보를 담는 구성은 UX에서 피해야 할 방식으로 간주되지만, 이 경우 사용자는 하루에 한 번씩 약 두 달간 반복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입력의 속도와 효율성을 더 중요하게 판단했다.
입력 항목은 사용자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나, 반복적인 숙련이나 학습 과정을 필요로 하는 수준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앱 내 가이드와 처방 시 병원 측의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사용자 혼란은 충분히 최소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해당 설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종적으로는 페이지 단위로 나뉜 입력 플로우가 적용되었고, 이후 필로우 2.0, 섭식장애, 알코올중독 등 여러 프로젝트에서도 같은 구조를 사용하게되었다. 물론 이 방식은 첫 작성이 수월하고, 항목 간 상호작용을 명확히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비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임상 시험 대상자들의 후기뿐만 아니라 내부 작업자들과 심지어 이 화면을 처음 접한 일부 신규 입사자들도 페이지 구조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 UX 디자이너의 업무는 주로 ‘예상’을 바탕으로 설득하는 경우가 많아, 설득의 어려움이 늘 존재했다. 이번처럼 전통적인 이론을 역행하는 선택이 오히려 더 나은 방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흥미로웠으나, 동시에 가장 큰 후회로 남아 있다.

PilLow Rx 2.0
2차 임상시험 성공 이후 진행된 프로젝트로, 임상시험 도중에는 변경할 수 없었던 주요 개선 사항을 중심으로 설계가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개선 내용으로는 수면 기록 항목의 축소, 오입력 및 오류를 줄이기 위한 입력 방식 개선, 콘텐츠 확장에 따른 레이아웃 변경 등이 포함된다.
가장 큰 변화는 홈 화면과 콘텐츠 화면의 분리였다. 초기 버전에서는 수면 기록 기능과 교육 콘텐츠가 하나의 화면에서 함께 제공되었으나, 실제 사용자 행동 데이터와 임상시험 운영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반영해 구조를 분리하게 되었다.
첫째, 1일 이상 경과한 미작성 수면 기록은 더 이상 홈 화면에 노출되지 않도록 변경되었다. 이는 뒤늦게 작성된 기록의 경우,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해 임의로 입력되거나 아예 작성되지 않는 사례가 다수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소 과감한 시도였지면 기록의 횟수 확보보다 신뢰도가 중요하다 판단하여 진행된 사항이다.
둘째, 교육 콘텐츠는 앱 사용 경과에 따라 점진적으로 제공되도록 변경되었다. 이는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콘텐츠를 몰아 소비한 뒤, 수면 기록만 형식적으로 작성하는 이른바 ‘가짜 유저’ 패턴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사용자의 학습 효과를 높이고, 인지 내용을 점진적으로 내재화하도록 유도하는 목적도 함께 고려되었다.
셋째, 콘텐츠의 양과 형식이 대폭 확장되었다. 기존의 읽기 중심 콘텐츠 외에도 일반 상식, 테스트, 설문, 퀴즈 등 다양한 상호작용 요소가 추가되었으며, 이에 따라 콘텐츠 전달에 특화된 전용 화면이 구성되었다. 이해 더해 목표 취침 시간 알고리즘이 개선되면서 해당 항목의 중요도가 높아졌고, 이에 따라 홈 화면 중심 요소로 재배치되었다. 또한, 사용자가 목표 시간을 설정할 때 선택한 시간대에 따라 실시간으로 배경 색상이 변화하는 인터랙션이 추가되었으며, 내·외부 테스트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입력 자동화를 위한 디바이스 연동 가능성도 함께 검토되었다. 비록 실제 서비스 적용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스마트 워치와 스마트 링을 활용한 수면 정보 자동 입력 기능은 내부 테스트 단계까지 진행되었고, 향후 확장을 고려한 구조 설계가 선행되었다.

홈 화면

목표 취침 시간

교육 콘텐츠
규제 분야의 한계와 디자이너
UX 설계는 가이드를 발행한 이후에도, 개발 과정의 현실적 제약이나 예상치 못한 기술적 문제, 뒤늦게 떠오른 더 나은 아이디어, 단순한 실수 등 다양한 후속 수정사항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설계는 다른 프로세스와 병행해 진행되며,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 즉 버전 관리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부 정부 과제는 일정 시점 이후 오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항목을 수정할 수 없는 구조를 갖는다. 완벽한 결과물을 처음부터 만들기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구조에서는 초안이 곧 최종안이 되어버리기 쉽다.
필로우 프로젝트 역시 이 같은 구조적 제약으로 인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유사한 과제들에서는 중간 산출물 단계부터 변경 가능성이 높은 항목들을 중심으로 중립적이고 모호한 표현으로 가이드를 구성하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로 이 전략은 후속 작업에서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으며, 제약된 환경 속에서 디자이너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 중 하나였다.
물론 이런 방식이 이상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이처럼 '애초에 명확히 하지 않는 전략'에 의존해야만 하는 현재 제도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는 한 사용자 중심의 완성도 높은 제품을 구현하는 데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훌륭한 제품이 탄생하려면, 시행착오를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점차 의미 있는 변화가 있기를 기대한다.
사용 툴
Photoshop
(그래픽)
After Effects
(영상)
Figma
(그래픽, 설계)